▶ 소재지:전남 장성군 남면 행정리 검정
제각을 묘소 아래 세운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면 제사를 모시는 곳으로 사용하려는 것이다. 5세손들이 5대조를 해마다 한 번씩 제사를 모시는 것은 대수(代數)가 멀어진 조상님께 덕을 생각하여 제사에 정성을 다해 모셔야 하기에 이 집을 영모재(永慕齋)라 이름한 것이다. 장성(長城)고을 남면 검정마을은 양성이씨(陽城李氏)가 대대로 살아온 지역이다. 고마산(古馬山) 한 줄기가 구불구불 남쪽으로 뻗어 내려와 마을앞산이 되었는데 단정한 모습에 맑은 기운이 어려 있는 이곳에 장사랑공(將仕郞公)이 봉분이 사척(四尺) 높이 자리하고 있다.
십수년(十數年) 전에 후손들이 한결같은 마음으로 재실(齋室) 한 동을 기와집으로 지은 것은 오랜 세월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. 매번 묘제를 모실 때면 깨끗한 일가들이 모여 제계하며 유숙하기도 하고 예절을 토론하기도 한다. 또 그 곁에 고직사를 지어 제기와 제수를 준비하여 소장하는 장소로 사용하게 하였으니 그 완벽한 제도와 자상한 규모와 모든 조목이 다 조상님을 길이 추모하는 정성에서 발현(發顯)된 것이다. 이러한 정성이 있었기에 이와 같은 재실을 세울 수 있었으며 이 재실에서 조상님의 신명(神明)을 모시고 경건한 마음으로 분향을 하며 제사를 모시니 영혼이 그 위에 있는 듯 하기도 하고 그 좌우(左右)에 있는 듯하다. 이는 부(父), 조(祖), 증(曾), 고(高) 등 사친(四親)을 사당에서 제사를 모시는 외에 조상님께 보답하는 도리(道理)이니 조상님을 추모하는 뜻이 멀기만 한데 더구나 또다시 재실 이름을 영모(永慕)라 하였으니 더 한층 가상하다는 것은 그 집을 짓기 시작한 결과를 언급하면서 밝혀둔다. 그 사당이 훼손되고 위패를 옮겨간 뒤 많은 세월이 경과하지 않아 묘소 아래 재실이 모습을 드러냈으니 만일 재실을 짓기에 앞서 조상님을 영구히 사모한다는 실체(實體)가 자손들의 마음 속에 갖추어 있지 아니하였다면 이 건물을 세울 수 있는 자금[功用] 준비의 신속함이 과연 이와 같겠는가.
생각해보면 이처럼 좋은 영모(永慕)라는 제목(題目)을 써서 그 후손들에게 남겨주었으니 그 교훈이 매우 여유롭기만 하다. 나는 바라노니 높으신 이씨문중(李氏門中) 후손들은 어른들의 이 교훈을 가슴 깊이 새겨 모두 다 오늘날 문중 어른들의 심정을 잘 읽어 자신들의 심정으로 삼는다면 예기(禮記)에서 이른바 선비가 제사를 잘 모시면 반드시 그 복을 받는다는 것을 이 가문에 해당된다고 할 것이요. 이씨(李氏) 가문의 번창이 침체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짐작케 된다. 이 집을 세운 지 몇 년 뒤 그 석까래 사이에 이 기문을 쓰노라.
행주(幸州) 기동설(奇東卨) 씀
영모재(永慕齋)
19세 이한담(李漢聃)